목록살면서 드는 생각 (31)
세나의 뜻밖의 하루

최근 좌절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저 무방비하게 그 좌절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한 번씩 그런 나날들이 찾아오는 것 같다. 자리에 누워도 사로잡힌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몇 시간이고 고민하다가 밤을 지새우는 그런 하루의 끝들. 그저 여기서 포기하고 단념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이 나를 휘두르는 대로, 그저 그렇게 휘둘리는 것뿐이겠지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랬는데, 그런데 왜 세상은 나한테 여기 까지라고만 얘기하는 거지? 세상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흔히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

작년에 회사에 취업하고 나서, 남몰래 세운 나만의 회사생활 목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칭찬 폭격기가 되는 것! 간호사를 하고, CRC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나 스스로의 업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가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 동료들과 얼마나 친화적인 관계를 형성하느냐도 직장 생활에 매우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 속에서 더불어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독하고 카리스마 있고 일만 하는 독고다이보다, 다정하고 친화적이고 협력하는 사람이 조직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을 종종 봐왔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나오는 위의 문장처럼, 이..

어제와 비슷한 오늘 하루를 살면서 또 잠깐의 망상 타임을 가졌다. 어쩌면 인생에 운명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이미 정해진 틀 같은 거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조금 겪고 보니 한 사람의 지난날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다음에 갈 길을 대충 예상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보자. 내 앞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사람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내일도 담배를 피우겠구나 뭐 이런 예측을 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껏 10년 넘게 담배를 피워왔다고 했을 때, 저 사람이 내일 담배를 필지 안 필지 충분히 예상이 된다. 물론 그 예상이 무조건 그렇게 일어나리라는 단정은 아니지만 이는 분명히 설득력 있는 가정이고, 바로 그걸 운명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어느 순간 결심을..

결정론이냐 자유의지론이냐 하는 논의는 지난 몇 달간 내가 곰곰이 생각해 오던 주제였다.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우연에 우연이 겹쳐 내 하루가 구성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몇 년이 지나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는,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어떠한 거대한 힘 같은 것이 내 생에 작용하여 여기까지 흘러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고등학교 삼 학년이었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수능을 불과 한 두 달 남겨놓았던 때였는데, 대여섯 개 대학에 수시를 지원해 놓고, 그중 이미 2개 대학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던 상태였다. 그 두 개 대학은 내 기준 상 나름 안정권이라 생각하여 무조건 붙겠거니 생각해두고 있던 대학이었는데, 그 '안정권' 대학들에 연거푸 퇴짜를 맞아놓았으니 대학을 자신의 ..

이번 달에 들어 CRC 3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평상시에는 병원에 틀어박혀 이것저것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지만, 어제는 조금 색다른 경험을 했다. 퇴근하고 교수님, 전문의, 약사, 다른 연구간호사 선생님들과 같이 제약사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장소가 서울에서 꽤 유명한 5성급 호텔이라 깜짝 놀랐다. 역시 병원이 아니라 제약회사라 이렇게 대단한 곳에서 하는 건가... 싶었다. 평생 가볼 일 없는 호텔 입구에서, 그리고 대강당 입구에서 온통 정장을 입으신 멋진 분들에게 인사와 안내를 받으니 얼떨떨했다. 교수님 덕분에 이런 경험도 다 해보는구나 싶었다. 나눠주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 뒤 심포지엄이 시작되었다. 우리 과에서 다루고 있는 희귀 질환을 주제로 하는 심포지엄이었고, 특히나..

한 인간의 삶은 시간에서 출발한다. 그 사람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는 곧 인생에 대한 태도와 직결된다.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이고, 미시적으로 바라본다면 매일 마주하는 순간들의 누적이다. 이 두 가지 관점 모두 시간이라는 개념이 개입돼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삶은 곧 시간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느끼는가? 세상의 모든 것이 낡고 늙고 죽어가는 하나의 방향성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체감한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을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로 표현하고 싶다. 시간은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전진해간다. 시간은 과거를 지나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한다. 달..

쓸모와 가치를 연결 짓지 마라. 어떤 것이 쓸모 있고 유용하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어떤 것이 쓸모없다고 하여,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 땅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일일이 가격을 따지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데 익숙해졌다. 본래 가격표가 매겨지는 재화와 서비스를 넘어서 이제는 가족과 우정, 사랑, 꿈에도 가격이 매겨진다. 그리고 가격은 곧 가치가 된다. 마치 비싼 상품들이 제값을 할 것이라는 기대처럼. 어제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나의 사랑을 자본주의의 저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 사랑은 과연 나에게 어떤 효용이 있는가? 나는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이며 또 무엇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연인과 함께 하는 동안 소모하는 나의 시간, 돈, 감정적 에너지를 저울..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그러한 세상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랫동안 꾸어왔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온다. 노력과 애정을 쏟았어도 이를 배반당하고, 거절당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 앞에서 생각해본다. 나는 그런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또 나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 이제부터 간단한 심상을 하나 그려보자. 내 앞에 3미터 남짓한 거리에 화장실 휴지통 크기만 한 바구니가 하나 놓여있다. 나는 오른손에 작은 야구공 하나를 쥐고 있다. 그리고 그 바구니 안에 야구공을 던져 넣으려고 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목표물의 거리와 크기를 세심히..

인생은 설레는 것들로 가득하다. 다만 그 설렘들을 내가 얼마만큼이나 발견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듯하다. 내가 익숙하던 반경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날 줄 안다면 온갖 설렘을 마주할 수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평소의 나라면 망설이며 하지 않았을 일들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다. 이전의 나는 새로운 경험의 앞에서 이것저것 재면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꽤 나쁜 버릇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할까 말까 고민할 바에야, 미친 척하고 한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진작에 왜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새로운 장소로 가기 전에는 길을 잃진 않을까 걱정했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위기란 것은 어떠한 사건을 맞닥뜨리면서 발..

그간 연애와 이별을 통해 배운 것들을 꼭 남겨야 할 것 같다. 기뻤던 기억들과 아팠던 기억들 모두 나에게 크나큰 배움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값진 경험들을 고스란히 나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1.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과 기회는 한 번 사라져버리면 그걸로 끝이더라. 기회가 나에게 왔을 때, 내게 기회가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이를 온전히 활용하자. 2. 내가 가진 사랑을 남김없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배웠다. 온갖 두려움과 서글픈 계산들 앞에서도 그에게 나의 모든 믿음과 사랑을 주었을 때, 그것이 도리어 나에게 가져다주는 보상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사랑을 통해서 진정으로 아름다워지는 나의 내면을 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