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살면서 드는 생각 (31)
세나의 뜻밖의 하루

병원 입사를 5일 앞두고,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일이 힘들 거라고 오히려 내 주변에서 나를 더 걱정해주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런 느낌조차 없다. (아니면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런 건가? 일단 그건 다음 주에 생각해보자.) 뭐든지 이미 각오를 해버리면 애초에 가졌었던 부담감조차 사라져버리나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거야 간호학과 입학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니까.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신규 간호사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왜냐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장 책임질 것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다. 그저 가르쳐주는 프리셉터 선생님 따라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면 된다. (그분들도 업무 시간 쪼개가며 어렵게 가르쳐주시는 것이므로) 간호사는 나름..

왜 연애를 해도 불안할까? 아니다. 난 이 질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연애를 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연애라는 것은 가장 사적인 경험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 가장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린다. 그로 인해 혹여 일이 잘못 풀릴 경우에 감내해야 할 내상은 그 뿌리를 들어내야만 하는 일이므로, 이는 엄청난 두려움을 자극한다. 불안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알 수 없는 미래와 주변의 위협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민하게 대처하려는 이 '생존 모드'가 곧 불안인 것이다. 연애할 때 불안한 이유는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는 혹자의 의견에 반대한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장 친밀하고 사적인 공간에 상대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 모드'를 켤 수밖에 ..

방년 26세, 살아오면서 나름 생각한 것도, 깨달은 것도 많다. 그래도 종종 까먹길래 이렇게 정리를 해놓아야겠다. 돈보다 자유로운 삶이 우선이다. 돈은 없다가도 생기지만 시간과 기회는 흘러가면 그만이다. 다들 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먹고사니즘은 누구에게나 다 힘들고 그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남들이 말하는 정답을 살아내려 하지 않고 다만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겠다. 인생은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없다. 내일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오늘의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자. 행복은 주도적으로 찾아 나설 때 발견할 수 있다. 유튜브나 sns로 시간 흘려보내는 그런 거 말고. 멍하게 있거나 게을러지는 그런 거 말고. 즐겁고 쉽..
관상계의 2인자 없는 1인자로 소문이 자자한 신기원 할아버지께 관상을 보러 다녀왔다. 허영만 '꼴' 만화에도 등장하시고, 영화 관상에 자문도 하셨다던데 관상 쪽에서 꽤 이름을 떨치시는 분인 것 같았다. 시간에 맞춰 예약제로 진행하는게 아니라 일찍 온 사람이 먼저 명단에 이름을 적고, 앞사람 순서가 끝나는 대로 그다음 사람이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방문한 날, 대기하고 있는 앞 사람이 많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관상 연구소는 12시에 오픈이어서, 미리 가서 제일 첫 번째로 이름을 적어놓을 요량으로 10시에 도착했더니 1등으로 적을 수 있었다. 특히 주말에 방문자가 많을 수 있으니 오전 시간에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10시 전에 도착해서 1등으로 이름을 적어놓고, 남..

미래는 알 수 없고 우리는 심연에 둘러싸여 있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왜 하루하루를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가?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 게 인간인데, 나는 그간 무엇을 좇으며 인생을 살아왔을까? 내일 당장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래, 그래도 난 꽤 괜찮은 삶을 살았어.'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뜻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주어진 것들만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걸 좋아하지? 언제 가장..

우연히 몇 년 만에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았다. 몇 백 개씩이나 쌓인 알림을 대충 훑고 역시나 수없이 쌓인 피드를 무심히 스크롤했다. 스크롤을 내리던 중 '알 수도 있는 친구 추천' 칸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대학생 시절, 수년을 함께 알고 지냈던 선배였다. '아직도 열심히 살고 계시려나...' 최근 게시물이 불과 몇 주 전이었으므로 여전히 페이스북 업로드를 하고 있는 듯했다. 연락이 끊긴 지 꽤 됐지만 오랜만에 이렇게라도 마주하는 얼굴은 반가웠다. 그 선배 페이지를 통해 수 없이 많은 페이지들을 타고 들어가며 잊고 지냈던 얼굴들을 다시 만났다. 비짓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반가웠다는 말로는 다 담기지 못할 마음이었다. 함께 거리를 쏘다니고, 한밤에 손을 맞잡으며 눈물 흘리고, 이리저리 소리도 지르고,..

간호대 4학년 1학기 모성 간호 실습으로 분만장에서 1주일 간 실습한 적이 있다. 1주일 동안 분만장을 돌면서 여러 분만 케이스들, 그러니까 산모들의 출산 현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다. 산모들이 여러 시간 동안 진통하는 모습과 자연 분만, 제왕절개 케이스 모두를 관찰했던 것이다. 분만장 실습 첫날부터 자연 분만 케이스를 관찰했는데, 그 적나라한 광경에 속이 울렁거리고 땅이 움직이는 듯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제왕절개 케이스는 그보다도 더 지켜보기 어려웠다. 산모의 배와 자궁을 절개한 뒤 쇠 막대로 절개 부위를 옆으로 째고 늘리며 그 속에서 아기를 끄집어내었다. 분만장에서 함께 실습했던 동기들은 저마다 '나는 애 못 낳겠다'라고 한 마디씩 했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지난한..
몇 주 전, 뻐근한 뒷목 때문에 정형외과를 방문했다가 '경추 부정렬' 진단을 받았다. 찾아보니 대충 거북목, 일자목의 어려운 의학적 표현이더라. 정상적인 사람의 목은 머리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완만한 커브를 형성해야 하는데 엑스레이에서 보여지는 나의 목은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허옇게 찍힌 나의 목뼈 사진을 거대한 모니터 화면에 띄운 상태로 의사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뼈 형태를 따라 붉은색 형광펜으로 커다란 S자를 표시했다. '자, 여기 경추가 조금 앞으로 기울어져 있네요?' 한 사람의 성격은 얼굴 주름에서, 라이프 스타일은 몸에서 알 수 있다더니, 딱 내가 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고개를 잔뜩 숙인 채 구부정하게 의자에 앉고, 머리를 깐딱깐딱하면서 핸드폰 화면을 몇 시간째 들여다보았던 ..

우리는 아마 평생 외롭지 않을까? 언제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 하든, 혼자 있든, 낮이든 밤이든 외로움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누구도 외로워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누구도 내 삶에서 더 이상의 외로움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득 이 세상은 인간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으로 지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취하게 하는 술.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의 차들과 사람들. 현란하게 반짝이는 거리의 불빛들. 무한한 얼굴들로 가득 차는 SNS 화면들. 나의 가슴 속 깊이 참을 수 없는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그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바친다. 한시라도 공허한 순간은 버티기 힘들다. 그 미세한 틈마저 메우기 위해 멍하니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고, 순간 나의 이목을..

내 연인은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니다, 고쳐 말하자면 나의 기대만큼 연락하지 않는 편이다. 대부분의 연락은 잠들기 전 밤 시간이다. 밤에 잠들기 전, 매일 11시쯤에 한 시간씩 통화를 하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의례가 되었지만, 그 이외의 연락은 드물다. 따로 데이트 약속 없이 서로 각자의 하루를 보낼 때에는 카톡 답장 텀이 2시간은 기본이다. 그러다보니 하루 동안 서로 오가는 카톡 대화 내용은 핸드폰의 한 두 화면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처음엔 참으로 속상하고 답답했다.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만큼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건가?' 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내가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않는건가?'를 거쳐 결국엔 '그 사람은 나만큼 나를 사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