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살면서 드는 생각 (31)
세나의 뜻밖의 하루
얼마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꽤 힘들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서 의외였다. 힘들기보다는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별한 지 첫 몇 시간은 지나간 좋았던 추억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근데 또 막상 생각해보니까, 그때의 기억이 그때 당시에는 정말 좋기만 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 초반에는 나에 대한 이 사람의 마음이 진심일까 쉽사리 믿을 수 없어 고민했었고, 연애 기간 내내 나는 상대방의 서투른 표현 때문에 불안해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그 사람이 떠나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고 자유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미화된 기억을 들추어보니 그 반대편엔 나는 언제나 아파하고 있었다. 데이트할 때 무뚝뚝한 표정, 뜸한 스킨십, '우리'가 아닌 본인 위주로 이루어지는 대화, 나의 부재를 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때. 나는 요즘 퇴근하고 난 이후가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하기 싫을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드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에 대한 압박감에 대한 반박으로 내 뇌가 '에라이, 그냥 다 때려쳐'라며 파업을 선언하는 방식이다. 보통 나의 투두 리스트가 텅 비어있고,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나의 자유 의지에 따라 쓸 수 있던 때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얼 할까 고민을 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해야 되는 일들이 조금 쌓였다. 매일 출근을 해야 하고,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자소서 쓰기와 취준에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루 동..
병원에서 이번 주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해졌다. 일이 그렇게 고된 것도 아니고 나름 편하게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난 왜 답답해하는 거지? 궁금했다. 찬찬히 일기를 쓰면서 나 자신한테 물어봤다. 뭐 때문에 답답하냐고. 결론은, 너무 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더 많은 일을, 더 잘 해내도록 욕심부렸고 완벽한 계획에 스스로를 욱여넣으려고 닦달했다. 1. 병원 일을 미스 없이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는데, 오늘 잠시 버벅거렸다. 몇 번의 실수와 미숙함을 이유로 나에게 윽박질렀다, '다음번에 또 이러진 말아라.' 이제 겨우 일한 지 5일 됐는데 말이다. 2. 채용 공고가 몇 개 올라왔는데, 그중 어떤 인턴십 공고의 모집 기한이 이번 주까지였다. 굳이, 반드시 그..
드디어 코로나 19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한창 병원에서 근무할 때만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코로나에 노출될지 모를 일이었으므로 나름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이번 참에 백신 접종을 완료해서 한시름 놓았다. 1, 2차를 4주 간격을 두고 맞았다. 1차 때는 딱히 심각한 부작용은 없었다. 부작용이라고 해봐야 접종 부위 팔 근육의 아린듯한 통증, 직경 7cm 정도의 홍반 정도? 팔이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운동할 때나, 일상생활할 때에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도 접종 이틀 뒤에는 모두 없어졌다. 그런데 웬걸. 2차 맞고 나선 진.심. 죽는 줄 알았다 1차보다 2차가 더 힘들다고 하던데 역시 이래서 그랬던 거였구나...라며 뼈저리게 공감했다. #접종 당일 오전 10시 즈음에 맞았는데, 주사는 따끔한 느낌조차도 ..
'인생은 한바탕 연극과도 같다.'는 매우 클리셰스러운 명언이 있다. 그 말대로 인생이 연극이고 내가 배우라면, 나는 지금 단역이다. 아무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연예인들이더라도 과거 한때는 모두들 단역이었을 것이다. 다 그렇게 거치면서 성장하는 거지. 수십수백 번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남들은 하찮게 여기는 단역들에 지원하지만 그마저도 연거푸 탈락하기 일쑤다. 일도 고되고 남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심지어 잘 눈에 띄지조차 않는다. 그렇게 단역만 전전하다가도, 끊임없이 가슴속 불을 안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조그마한 조연 자리를 하나 따내게 된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통해 세상에 나를 제대로 펼쳐보고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땀과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다. 그렇게 조..
근 1년 만에 또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 한창 병원들 시험 보러 다니고, 면접 보러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걸 1년이 지난 지금 또 하게 될 줄이야^^ 작년에는 병원에서 취업만 시켜주면 아주 병원에 내 뼈를 묻고, 환자 생각밖에 없는 못 말리는 나이팅게일이 되겠지 싶었다. 나중에는 수간호사, 멀리는 간호부장까지 넘보았었던 아주 꿈도 야무진, 패기 넘치는 사나이었었지, 나 자신... 그때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듯하다. 간호대를 졸업했으니까, 다른 동기들도 거의 다가 간호사를 하니까, 나도 간호사를 하는 게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막연하게만 받아들인 채 이걸 적극적으로 내 삶에서 실현해내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행..
1. 더 이상 침해받지 않는 나의 하루가 너무나 소중하다. 오로지 나의 의지로 꾸려갈 수 있는 이 시간들이 이렇게 값진 것이었다니! 이제는 나의 모든 활동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한다. 통상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이른 시간에 출근해야 하고, 가스 고지서를 납부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활동이고,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내가 이용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활동이다. 나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비로소 나를 위한 삶이 시작되는 듯하다. 남들을 위해 갖다 바쳤던 나의 시간과 건..
종종 그럴 때가 있다. 하루가 못 견디게 공허한 날. 집에 있어도, 카페에 있어도, 바깥에서 산책을 해도, 아무리 무언가를 해보려 발버둥을 쳐봐도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 관 안에 갇혀있는 듯한 숨 막히는 답답함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떠나 어딘가 멀리멀리 떠나버리고도 싶은 그런 무자비한 공허함. 다른 공간으로 훌쩍 떠난다면 나에게 들러붙어있는 이 그림자 또한 떼어놓고 갈 수 있을까. 친구들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또다시 돌아오는 약속 없는 하루엔 어김없이 답답함이 찾아온다. 혼자 남겨진 시간이 마치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늘여놓은 용수철과 같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를 뿐이다. 퇴사하기 전에는 마냥 장밋빛일 것 같던 하루도, 막상 퇴..
대병에 6월 1일 자로 입사하여 6월 10일에 퇴사했다. 이틀 간의 오프를 빼면 8일 동안 출근하고 간호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간호사, 참으로 힘들었다. 매일매일을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며 늘 눈물을 달고 살았다. 차라리 출근길에 잘못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을 할 정도로 스트레스는 극심했다. 탈임상, 참으로 잘했다. 간호사를 할 때는 하루하루가 막막하고 앞길이 어두웠는데 병원을 나오고 나니 내가 갈 수 있는 길, 할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하여 다시 정리해보는 나의 탈임상 이유, 1. 신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고생한다(근무 중에는 물론이고 퇴근 후에도 그렇다). 간호사는 탄다, 그것도 아주 자글자글. 재가 되도록. 그에 비해 월급은 적고, 인정받지도 못한다. 환자에게서..
오늘은 참으로 요상한 하루다. 본가에서 독립해서 새 집으로 이사했다. 정신없이 짐 정리를 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사느라 마트와 다이소를 왔다 갔다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 신고를 하고, 내일 출근을 위해 필요한 서류나 준비물을 준비했다. 정말이지 못해도 이만 보는 걸었을 거다. 더군다나 나만 바쁜 게 아니었다. 공인중개사에서, 관리 사무소에서, 도시가스에서, 어제 주문한 인테리어 물품들 회사에서, 수많은 연락들로 인해 나의 핸드폰마저 끊임없이 진동음을 내뿜으며 소식을 알려야 했다. 정신없이 쏘다니고 계속 바지런을 떨다가 집에 돌아와서 문득, '아 집에 가고 싶다' . . . '아 맞다, 나 지금 집이지' 익숙하고 정들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옮겨온다는 것은 늘 어느 정도의 센치함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