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의 뜻밖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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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드는 생각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 나의 수능 썰

세나SENA 2023. 7. 2. 20:22

결정론이냐 자유의지론이냐 하는 논의는 지난 몇 달간 내가 곰곰이 생각해 오던 주제였다.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우연에 우연이 겹쳐 내 하루가 구성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몇 년이 지나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는,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어떠한 거대한 힘 같은 것이 내 생에 작용하여 여기까지 흘러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고등학교 삼 학년이었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수능을 불과 한 두 달 남겨놓았던 때였는데, 대여섯 개 대학에 수시를 지원해 놓고, 그중 이미 2개 대학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던 상태였다.

그 두 개 대학은 내 기준 상 나름 안정권이라 생각하여 무조건 붙겠거니 생각해두고 있던 대학이었는데, 그 '안정권' 대학들에 연거푸 퇴짜를 맞아놓았으니

대학을 자신의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있던 고삼짜리에게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었을지 가늠이 올 것이다.

당시 나는 남들에게 표는 내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절박함과 아찔함, 우울함이 매일 나를 덮쳐왔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한 피 말리는 하루하루 속 어느 날 연세대 수시 논술 시험을 볼 날이 다가왔다.

나에겐 절박하고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될 그런 날, 이럴 수가, 우리 집 온 가족이 시험 당일 늦잠을 잔 게 아닌가?

평소에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우리 부모님이었는데, 그날은 단체로 뭐라도 씌었는지, 하필 그날! 늦잠을 잔 것이다.

결국 논술 시험장에 늦게 들어가고, 손이 달달 떨릴 정도로 완전히 패닉이 왔지만 그래도 어떻게 정신을 부여잡고 시험을 쳤었더랬다.

 

그리고 며칠 뒤 합격 여부 조회를 했는데, 하필 또 대기 번호가 1번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기막힌 조화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예 불합격인 것도 아니고, 내 앞에 한 명만 없어지면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대학들 수시는 죄다 떨어졌지, 이제 기대를 걸어볼 곳이라고는 진짜 여기밖에 없는 배수진 그 자체의 상황이었다.

내 앞의 한 명이라도 제발 등록 취소를 해달라고 밤마다 하느님에게 빌고, 부처님에게 빌고, 알라에게 빌었다.

 

수능 전에 이런 여러 기막힌 상황들을 맛보고 여러 기복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지내다가,

결국 수능을 봤는데, 이런, 수능을 너무 잘 봐버렸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였다.

집에 돌아와 채점을 해보니 고등학교 3년 내내 쳤던 그 어떤 모의고사 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가 나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조상신이 내린 건지, 아니면 전생에 공주를 구한 건지 뭐를 구한 건지 모를 정도로.

 

이런 횡재가 내리니까 그때부터는 연대 수시에 지원한 사람들 중 그 누구라도 제발 등록 포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좋은 대학, 좋은 마음으로 다녀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또 기도하는 나를 보며

신이 있다면 기막히다며 웃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국 나는 대기 1번 앞에서 지원자가 끊겨서 다행히도(?) 연대에 합격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때의 경험 이후로 '참 인생이란 웃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불과 하루 만에 나의 소원이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져버린 그 상황이 너무 웃기는 것이다.

연대에 떨어지면 내 인생이 끝장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는 연대에 붙으면 오히려 내 인생이 너무 아쉬워지는 길로 홀라당 뒤집어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내 인생은 '내게 절대적이었던 무언가를 포기하는 연속'이었다.

 

대학 시절 절대적으로 여겼던 나의 삶의 철학과 신념들을 지금은 더 넓은 시야와 그릇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졸업하고 당연히 간호사로 살 줄 알았던 내가, 간호사를 열흘 만에 때려쳤다.

탈임상을 하고 나면 당연히 CRA가 되겠지 생각했던 내가, 지금은 DM 업무를 하고 있다.

 

이전의 내게 절대적이었던 나만의 기준들을 붙들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결코 지금의 나만큼 성장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과학조차 '반론 가능성'을 통해 발전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체되듯, 과학은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회의'를 통해 발전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도 스스로 내린 가설이 반증되면서 되려 성장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내 앞의 목표가 좌절되었다고 해서 낙담할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좌절이 가져다 줄 '운명의 반론'에 대해 눈을 떠야겠다.

 

나도 이 길 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를 때가 많다. 뭐 다 알아야 할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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