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의 뜻밖의 하루

신규간호사, 열흘 간의 소회, 그리고 퇴사 결심 -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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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간호사, 열흘 간의 소회, 그리고 퇴사 결심 - 2

세나SENA 2021. 6. 9. 22:14

대학을 다니는 6년 내내, 나는 당연히 간호사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평생 간호사로 살 줄 알았다.

사람을 보살피는 게 좋고 내 몸은 고생스러워도 마음만은 뿌듯했으니까.

6년간 노력과 애정을 쏟아부은 간호학, 그리고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남들보다 2년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데에서 오는 조바심과 졸업 후 첫 직장.

그 무엇 하나 쉬이 놓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열흘만에 병원을 뛰쳐나와야만 했을까.

먼저 간호사로 취업에 성공한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었다.

'출근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출근길에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라고.

근데 그 생각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열흘 가량 근무하면서 수많은 업무, 선임들, 무자비하게 방대한 공부량 등등 많은 것들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게 한 것은 환자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거의 다가 말기 암 환자들로 이제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 정도뿐인가 싶었다.

 

 

 

또한 나 자신도 너무나도 병들어가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울어대서 눈은 퉁퉁 붓다 못해 붉어지고 염증까지 생겨버렸다.

진짜 이러다가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겠다 싶었다^^

 

 

 

2) 미친듯한 업무량, 잡일, 오버타임은 당연한 것^^

종양 내과 병동 + 간호간병 통합 병동이라 업무는 당연히 많았고,

나는 막내여서 막내잡까지 처리해야 했다.

정규 업무 + 막내잡까지 하려면 적어도 1시간, 1시간 반 일찍 출근해야 한다.

선임들이 속사포처럼, 그것도 8시간 내내 끊임없이 알려주는 것들을 척척 알아들어야 하고

퇴근 후에는 그날 배운 것들을 빼곡히 정리해 다음 날이 되면 어제 가르쳐 준 것들을 거뜬히 수행해내야 한다.

3교대면 8시간 근무냐고? 어림없는 소리.

신규 때는 9시간은 기본, 10시간이 넘어가는 때도 수두룩하다. (나는 입사한 지 극초반이라 8시간은 꼬박꼬박 지켰지만 3월에 입사해 2개월 차가 된 동기들은 9~10시간씩 일했다.)

거기에 간호본부에서 시행하는 교육도 추가로 들어야 하고, 700개 가량의 단어 시험까지 보아야 한다.

또 거기에 매주 과제도 내주는데, 5 페이지 이상의 레포트를 제출해야 한다.

(첫 주에는 소화기계, 비뇨기계 해부학을 싹 다 정리해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3) 워라밸 파괴

이렇게 일할 게 많고, 공부할 게 많고, 과제할 게 많다 보니 내 개인 생활은 있을 수가 없다.

퇴근하고 나면 남은 시간은 무조건 공부하고 과제하는 데 써야 한다.

그야말로 '온'만 있을 뿐, '오프'가 없는 삶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계속 전속력으로만 달릴 수가 있겠는가.

잠시 쉬어가며 재충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데, 신규 간호사에게는 그딴 건 없다.

 

 

4) 건강 파괴

다음 날 출근하는 게 무서워서 매일 대체로 5시간 정도밖에 잘 수가 없었다.

잠에 들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가슴이 벌렁거려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매일 우느라 눈은 퉁퉁 부어있고, 전날 밤 제대로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야 했다.

출근해서는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매일 오전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이 있는데, 배선실까지 가서 정수기 물을 가져올 여유가 없어서

탈의실 화장실에서 몰래 세면대 수돗물을 손으로 떠다 먹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점심 식사는 지하에 직원 식당에서 하는데 식사 시간은 무조건 3분 컷이다.

세네 가지 반찬이 나오는 백반 식사는 3분이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카레나 덮밥 같이 무조건 단일 메뉴로만 식사한다.

그러면 더 빨리 마셔버릴 수 있으니까..허허허

아침 식사도 못하고 5시간을 서있다 보면 점심때 미친 듯이 배고파진다.

오후 근무를 또 버티려면 밥을 입으로 욱여넣어야 한다.

허겁지겁 짐승처럼 처(?) 먹는 내가 너무 싫었다.

 

 

5) 신규 간호사는 왕따

그렇다,,,신규는 왕따다,,,,

아무도 나에게 사적인 말을 건네지 않고 선임들 사이에 껴서 내내 불편한 상태로 엉거주춤 있는다.

선임들은 나를 앞에 세워두고서 자기들끼리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그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참 그게 기분이 썩 좋지는 못하다.

 

 

6) 나 자신의 발전이 없다

병원 입사 전 블로그, 이모티콘, 그림, 운동 등등 여러 일들에 도전했을 때

내가 겪었던 많은 자극과 도전 의지, 발전 의지들이 병원에 머무른다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간호사는 연차가 올라가도 업무 내용에 크게 변화가 없고, 막내와 고연차가 하는 일들이 차이가 별로 없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화해도 간호 업무의 내용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세상 속 비교적 늘 그대로인 직업인 간호사에서만 머무른다면

나도 그에 맞춰 반복되는 일상에 갇히고 매너리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선임 간호사들을 보면서도 역시 그러했다.

나는 일하고 돈 버는 게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닌데,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느끼고 스스로 발전하고 싶은데,

병원에만 있으면 나의 발전을 놓칠 것 같았다.

 

 

간호학과 학생,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탈임상=지능 순이라는 말이 돈다.

물론 무조건 임상이 나쁘고 간호사는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돌아서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나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병원 밖 세상이 두려워 일단 무작정 버티기만 한다면

되레 병원에 가스라이팅 당해서 자존감 무너지고, '난 왜 이거밖에 안될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너무 슬픈 결말이지 않을까?

버티는 건 답이 아니다.

오히려 병원 밖의 또 다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는 셈일 수도 있다.

 

 

 

나를 짓밟는 것들에 대해 거침없이 NO라고 외치기로 했다.

그깟 돈 몇 푼, 경력 몇 줄에 나 자신을 팔지 않기로 했다.

연봉과 경력,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러나?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남들에게 '인정'받는 인생을 살아야 하나?

 

 

 

나는 이번 기회로 나의 피 같은 시간과 건강, 행복을 깎아먹으면서 돈을 벌지는 않겠다 결심했다.

돈은 생겼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지만

나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기회는 붙잡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걸 포기하며, 체념하며 살아가진 말아야지.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출근 전, 늘 이 곰돌이를 돌아보고서 집을 나선다. 이젠 얘만 봐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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